병렬독서가 뇌과학적으로 더 효과적인 이유 — 인터리빙과 기억 고착의 원리
서점에서 돌아다니며 짧게 짧게 읽은 내용이 카페에서 집중해 오랫동안 읽은 것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습니다. 완독 강박, DMN, 인터리빙의 뇌과학으로 병렬독서를 설명합니다.
평소에 서점에 놀러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돌아다니며, 신간 코너, 베스트셀러 테이블, 관심 있는 분야 서가. 손이 가는 책이 있으면 꺼내서 목차를 훑고, 마음에 드는 챕터가 있으면 서서 읽습니다. 5분, 10분. 때로는 20분씩. 그러다 또 다른 책이 눈에 띄면 그쪽으로 걸어갑니다.
그렇게 한 참을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와보면 이상한 느낌이 드는때가 있지요.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챕터씩 읽었던 그 책들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문장들이 머릿속에 문득문득 떠오르곤 하지요. 그런데 카페에서 두 시간 동안 한 권을 읽었던 날, 책을 덮고 일어서는 순간 방금 읽은 것이 이미 흐릿해지는 경험도 있습니다.
집중력의 차이였을까요. 컨디션의 문제였을까요.
서점에서는 한 책을 읽다가 잠깐 걷고, 다른 책을 펼쳤다가 또 걷고, 다시 처음 책으로 돌아갔습니다. 정해진 순서도 없고, 체계도 없었습니다. 그냥 발이 이끄는 대로. 그런데 바로 그 산만해 보이는 방식이, 집중해서 읽은 것보다 기억에 더 많이 남겼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뇌과학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책을 덮는 순간, 뇌에서 무언가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른 책을 펼치는 것은 그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속시키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한 권씩 끝내야 한다”고 배워온 것이 사실은 뇌가 가장 잘 학습하는 방식과 반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 권씩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독서를 방해합니다
완독이 표준이 된 이유
독서에 관한 조언은 대부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한 권을 끝내고 다음 권을 시작하라. 시작한 책은 끝까지 읽어라. 여러 권을 동시에 읽으면 내용이 섞인다. 이것이 오랫동안 좋은 독서의 기준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학교에서도, 독서 모임에서도, 독서법을 다루는 책에서도 대체로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기준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흥미롭습니다. 책이 귀하던 시절, 한 권을 빌리면 그 한 권만 읽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완독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책의 희소성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는데, 기준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완독 강박이 만드는 역설
완독을 목표로 읽는 사람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참 흥미로웠던 책의 초반부를 지나면, 중반부에서는 속도가 느려지고. 후반부에서는 의무감으로 읽는 순간들이 오죠.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이상하게도 앞에서 읽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완독했는데, 남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반대의 경험도 있습니다. 어떤 책은 절반쯤 읽다가 멈췄는데 그 절반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완독하지 못한 책이 오히려 더 많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애독자의 절반 이상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2024년 한국리터러시학회에 발표된 연구가 있습니다.
성인 애독자들을 대상으로 병렬 독서 여부와 그 이유를 조사한 결과, 과반수 이상이 이미 병렬독서를 하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항상 한 가지 방식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 상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여러 권을 번갈아 읽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최영인, 리터러시 연구, 2024)
흥미로운 것은 그 이유입니다. 연구에서 확인된 병렬독서의 기제 중 하나가 여러 책 사이의 연결을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실천이었습니다. 이론을 몰라도, 뇌과학을 몰라도,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책을 덮는 순간에 있습니다.
책을 덮는 순간이 학습의 시작입니다
뇌가 쉴 때 일어나는 일
독서를 마치고 책을 덮습니다. 잠깐 멍하니 있습니다. 창밖을 보거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거나, 그냥 천장을 바라봅니다.
이 순간이 낭비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뇌 안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뇌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태에서, 실제로는 특정 뇌 회로가 활성화됩니다. 이것을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고 합니다. 외부 자극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억제되어 있다가, 주의가 풀리는 순간 켜지는 회로입니다. (참고: Behavioral Sciences, 2024, PMC)
DMN이 하는 일
DMN은 무엇을 할까요.
기억을 재생합니다. 방금 읽은 내용이 해마를 통해 피질로 전달되면서,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이 구간에서 일어납니다. 과학 용어로는 신경 재생(Neural Replay)이라고 합니다. 학습이 일어난 순서대로, 때로는 역순으로, 방금 입력된 정보를 다시 한번 처리하는 것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휴식 중 이 신경 재생 이벤트의 빈도가 높을수록 이후 과제 수행 능력의 향상이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출처: Behavioral Sciences, 2024, PMC)
다시 말하면, 책을 읽는 것 못지않게 책을 덮고 있는 시간이 기억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뜻입니다.
책과 책 사이의 공백이 기억을 새깁니다
이제 서점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서점에서 책을 읽다가 다른 책으로 이동할 때, 짧은 공백이 생깁니다. 책을 덮고, 걷고, 새 책을 찾고, 꺼내는 그 몇 분. 아무것도 읽지 않는 그 시간에 DMN이 작동하고, 방금 읽은 챕터의 내용이 뇌 안에서 재생됩니다.
카페에서 두 시간을 한 권에 쏟아붓는 방식은 이 공백이 없습니다. 읽고 또 읽고 또 읽습니다. DMN이 작동할 틈이 없습니다. 정보가 계속 들어오지만, 그것을 고착시키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서점에서의 산만해 보이는 독서가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의도치 않게 공백을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책 B를 여는 것이 책 A의 기억을 고착시킵니다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책 A를 덮고 DMN이 작동하는 상태에서, 전혀 다른 자극인 책 B를 시작하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해마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때 이전에 처리하던 내용을 기존 기억 구조와 연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책 B의 첫 페이지를 읽는 동안, 뇌는 책 A에서 입력된 내용을 어디에 저장할지 정리하는 작업을 함께 진행합니다. (참고: ScienceDirect, DMN and memory consolidation, 2025)
병렬독서가 기억력을 높인다는 주장이 단순히 “다양한 관점을 얻어서”가 아닌 이유입니다. 책과 책 사이의 전환 자체가 기억 고착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섞을수록 깊어지는 기억 — 인터리빙의 뇌과학
한 주제를 몰아 읽으면 생기는 착각
시험 전날 밤을 생각해봅니다.
한 과목만 몇 시간 동안 연속으로 공부합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고, 같은 개념을 계속 들여다봅니다. 끝날 무렵에는 다 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익숙해졌으니까요.
그런데 시험장에서, 혹은 며칠이 지난 뒤에 다시 보면 기억이 생각보다 많이 빠져있습니다.
이것이 집중 학습이 만드는 착각입니다. 내용에 익숙해지는 것을 기억한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인지과학에서는 이것을 유창성 착각(Fluency Illusion)이라고 부릅니다. 반복해서 노출될수록 처리가 쉬워지고, 그 쉬움을 이해로 오인하게 됩니다. (참고: Kornell & Bjork,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2008)
마찰이 기억을 만듭니다
인터리빙 학습(Interleaved Learning)은 반대 방향에서 작동합니다.
하나의 주제를 마스터하기 전에 다른 주제로 넘어갑니다. 다시 돌아옵니다. 또 다른 것으로 갔다가 돌아옵니다. 겉으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입니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신경영상 연구에 따르면 인터리빙 학습은 전두-두정엽 활동을 증가시키고 정보 검색 시간을 줄여, 집중 학습에 비해 더 나은 장기 기억과 효율적인 정보 인출을 가져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참고: Frontiers in Neuroscience, 2025)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 뇌는 이전 내용을 처음부터 다시 꺼내야 합니다. 익숙해서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 잊혀진 것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이 인출 과정이 기억을 더 단단하게 만듭니다. 어려움이 학습을 강화한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바람직한 어려움(Desirable Difficulties)”이라고 부릅니다.
서점에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점에서 책 A를 읽다가 책 B로 넘어간 것은 정확히 인터리빙이었습니다.
다시 책 A로 돌아왔을 때 뇌는 처음부터 맥락을 다시 불러와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책 A의 내용이 더 깊이 처리됐습니다. 카페에서 연속으로 읽는 것보다 서점에서 왔다 갔다 읽는 것이 더 기억에 남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터리빙은 산만함이 아닙니다. 뇌가 가장 잘 학습하는 방식입니다.
어떤 책을 함께 읽어야 하는가
아무 책이나 섞어도 되는가
한 가지 중요한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인터리빙이 효과적이라고 해서 완전히 무관한 것들을 섞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연구에 따르면 서로 관련 없는 주제를 인터리빙하면 인지 과부하가 발생하고 오히려 기억과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참고: BCIT LibGuides, Interleaving & Spacing)
수학 문제와 스페인어 어휘를 번갈아 공부하는 것이 효과 없는 이유와 같습니다. 뇌가 전혀 다른 두 가지 맥락 사이를 오가는 데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정작 내용을 처리하는 자원이 부족해집니다.
최적의 조합 원칙
효과적인 병렬독서를 위한 조합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책들을 함께 읽는 것입니다. 완전히 같은 주제가 아니라도 됩니다. 다만 하나를 읽으면서 다른 하나가 연상될 수 있는 수준의 연결성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둘째, 난이도의 차이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책 하나와 가볍게 읽히는 책 하나를 함께 두면, 어려운 책에서 피로감이 올 때 가벼운 책으로 전환하면서 공백을 만들 수 있습니다.
셋째, 픽션과 논픽션의 조합은 생각보다 효과적입니다. 논픽션에서 개념을 읽고, 픽션에서 그 개념이 인물의 행동으로 구현되는 것을 보는 과정이 이해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줍니다.
buildurself 독자를 위한 조합 예시
투자 심리 책과 뇌과학 책을 함께 읽는 조합은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뇌와 의사결정이라는 공통 축이 있어서 서로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가치투자 원칙 책과 심리학 책의 조합도 비슷합니다. 인간의 판단과 오류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카너먼을 읽으면서 버핏이 보이는 구조가 생깁니다.
자기계발 책과 소설의 조합은 개념과 인물의 결합입니다. 소설 속 인물의 선택이 자기계발 개념을 살아있게 만들어줍니다.
핵심 포인트
완전히 무관한 책을 섞으면 인지 과부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연결성이 있는 책들을 함께 읽을 때 인터리빙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난이도 차이를 활용하면 자연스러운 공백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픽션과 논픽션의 조합은 개념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줍니다.
공백을 설계하는 독서
책 A를 덮고 책 B를 여는 것은 전략입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병렬독서에 대한 관점이 조금 달라졌을 겁니다.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것이 산만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책과 책 사이의 공백을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 공백에서 DMN이 켜지고 기억이 고착되는 것입니다. 인터리빙의 마찰이 이해를 깊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더 의식적으로 설계할 수 있습니다.
운동 후 골든타임과 병렬독서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운동 직후에는 BDNF(뇌유래신경영양인자)가 분비되면서 뇌의 가소성이 높아지는 골든타임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 읽는 내용은 평소보다 더 잘 흡수될 수 있습니다. (참고: Ratey, J., Spark, 2008)
이 골든타임에 새로운 책을 시작하는 것, 그리고 이미 읽던 책으로 돌아오는 전환을 골든타임 안에 배치하는 것이 병렬독서를 더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새로운 자극과 회복의 사이클, 그리고 인터리빙이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3권 루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다면 그것이 출발점입니다. 여기에 두 권을 더 추가합니다.
하나는 비슷한 방향을 가리키는 다른 책. 지금 투자 책을 읽고 있다면 심리학 책이나 뇌과학 책을 옆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는 가볍게 읽히는 책. 집중이 필요한 책에서 잠깐 벗어났다가 돌아오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규칙은 하나입니다. 한 책이 지루해지거나 집중이 흐트러질 때, 책을 덮고 짧게 쉰 다음 다른 책을 여는 것. 그 공백이 기억을 만듭니다.
완독에 집착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이 책에서 무언가를 얻었다고 느껴질 때 다음 책으로 가면 됩니다. 뇌는 그 사이에 스스로 정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점으로 다시 가도 됩니다
서점을 돌아다니며 챕터씩 읽었던 그날.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산만해 보이는 방식이 DMN을 작동시키고, 인터리빙을 만들고, 기억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는 것을.
집에 읽던 책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서점에서 눈에 띄는 책이 있다면 꺼내서 읽어봐도 됩니다. 챕터 하나를 읽고 내려놓고, 다른 서가로 걸어가도 됩니다. 그 걷는 동안 방금 읽은 것이 뇌 안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한 권씩 끝내야 한다는 강박은 내려놓아도 됩니다.
뇌는 원래 그렇게 배우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를 조금씩, 사이사이 쉬면서, 다시 돌아오면서 배웁니다. 서점에서의 그 돌아다님이 사실 가장 뇌과학적인 독서였습니다.
오늘 서점에 가게 된다면, 마음에 드는 책을 집어도 됩니다. 집에 읽던 책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병렬독서의 시작입니다.
참고 자료
최영인, 성인 애독자의 독서 전략으로서의 병렬 독서에 대한 탐색, 리터러시 연구 (2024), 한국리터러시학회 Behavioral Sciences (2024), Rest to Promote Learning: A Brain Default Mode Network Perspective, PMC ScienceDirect (2025), The default mode network: where spontaneous thought meets memory consolidation Frontiers in Neuroscience (2025), Interleaved Multitask Learning with Energy Modulated Learning Progress Kornell, N. & Bjork, R.A. (2008), Learning concepts and categories,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Ratey, J., Spark: The Revolutionary New Science of Exercise and the Brain (2008), Little Brown BCIT LibGuides, Interleaving & Spacing — Study Skills
면책 조항
본 콘텐츠는 인지과학 및 학습 연구를 바탕으로 한 정보 제공 목적의 글입니다. 학습 효과는 개인의 인지 특성, 읽는 내용,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